굳이 우리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식성을 가졌다는 건, 외국 사는 처지에 있어 더없는 다행이긴 하다.
그치만 그게 안 먹고도 살 수 있다는거지 먹고 싶은 적이 전혀 없다거나 못 먹어도 아쉽지 않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음식이란 건 뭐랄까-...매일같이 꼭 빠짐없이 먹어야해서라기 보다는, 문득, 아주 문득 생각나서 먹고 싶어질 때
가장 먹고 싶은 바로 그 순간에 딱 먹으며 희열을 느끼는...캬...먹는 낙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말이지.
한국식품점이 없는 외국도시에 살면 다른 건 몰라도 그 '적시' 에 먹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집착녀의 경우라면 얘기는 좀 다르다.
먹는 것에 대한 나의 열망은, 생각난 그 음식을 먹고 말때까지 결코 사그러들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좀 지났다 하더라도 그 음식을 먹어주기만 하면 언제든 적시에 먹는 즐거움을 아직 만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단무지가 없으면 김치를 넣으라던 최과장님의 말이 마치 삶의 대명언처럼 꿈에서도 나오길 며칠. 오늘 결국 취리히엘 갔다.
가게문 열자마자 첫손님이었던지라 멀리서 부지런히도 왔다고 아주머니가 새우깡이랑 마이쭈도 덤으로 주셨다.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뿌듯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는데...
출발 2분 전, 이 방문의 목적이나 다름 없는 바로 그 단무지를 안 샀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
더 기막힌 건, 지갑도 없어졌다. 방금 들렀던 기차역 화장실에 두고 온 모양. 어흑. ㅠ_ㅠ
다행히 지갑은 무사히 찾았고, 단무지도 샀고. 출출해서 일단 사발면을 하나 먹고 김밥 준비를 열성적으로 하기 시작.
슬슬 배가 부르니 사람 맘이 어찌 간사한지 식탁 위 그득한 재료들이 너무나 귀찮은거다. 아이고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싶은 게.
몸을 비비 꼬아가며 김밥을 마는 건지 이것저것 주워 담는 건지 모를 성의 없는 작업을 끝냈다.
김밥 말 때 제일 싫은 단계는 김 위에 밥 펴 얹기. 강박증 증세가 있어서 그런가 밥알층의 두께 밀도 느무 신경 쓰임.
김밥 7줄과, 나름대로 소중한 꼬다리들, 그리고 진정한 분식집 메뉴의 완성을 위해 함께 한 라볶이.
이 한접시를 얻기 위해 내 토요일 반나절이 지나갔구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배고픔을 별로 느끼지 못해 늘 도시락을 남기곤 했다.
그나마 잘 먹는 게 김밥이라고 엄마가 김밥도시락을 상당히 자주 싸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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