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다. 젖은 공기냄새를 맡으며 걷노라니 고교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떤 이들에겐 천금을 주고라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일 수도 있겠고, 나를 포함한 또 어떤 이들에겐 졸업날이 그저 신나기만 했던, 그다지 돌아가고 싶진 않은 고교시절이기도 하겠지.
나의 고교시절- 특히 2-3 학년때의 기억은- '수학 두 문제' 라는 한마디로 대변될 수 있을 것 같다. 총 15반이었는데 그 중 11반이 문과, 4반이 이과. 여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과사랑 현상이긴 한데 우리학교의 문제는, 쌤들의 이과편애로 성적 상위권 학생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이과반에 다 몰아버렸다는 것. 그 결과, 같은 사람이 두 달 연속 이과 1등을 하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상위층이 지나치게 두터워져버려서 7명이 받을 수 있는 내신 1등급을 위해 고만고만한 낙타들은 그 바늘구멍을 뚫느라 상당히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
각 반에서 1-2등만 추려도 총 8명. 그 중 한 명은 1등급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 따라서 중요한 시험에서 재수 없게(?) 반 2등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는데, 그 결과는 수학이 판가름하곤 했다. 다들 웬만하면 잘 안 틀리는데다 국어 영어는 좀 틀린다 해도 점수차가 크게 벌어지진 않지만 수학은 달랐으니까. 그래서...수학을 한 문제 넘게 틀린다는 건 곧 재앙(...)을 의미했다. 자력회생은 불가하고 다른 경쟁자들의 실수만 기다려야 하는. 고 2-3학년 내내 그놈의 수학 두 문제 틀릴까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다른 풋풋한 추억은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ㅠ_ㅠ 그 x고생을 해서 1등급을 받긴 했으나 그 중 1-4등이 약속이나 한 듯 대입에서 떨어져 후기대를 갔다는 웃픈 스토리도 있다. ㅠ_ㅠ
그때와 똑같은 비냄새가 나는 가을날. 하지만 지금은 수학 몇 개 틀렸나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 작은 행복에 고마워해야 할 지, 아니면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못한 내 고교시절을 애도해야 할 지 잘 모르겠는 밤. 어쨌거나 이제는 흘러가버린 옛날 이야기.. 렛잇고우, 렛잇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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