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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가을날의 꿈

by SingerJ 2022. 1. 17.

드라마 '애인 있어요' 를 뒤늦게 보기 시작한 요즘. 강설리가 입고 다니는 '최강약대' 학과 티셔츠가 잡다한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뭐였더라...자주약대 였던가?

전기입시에서 떨어져 울며 겨자먹기로 간 우리학교를 진심으로 애정했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래도 우리 과, 조금은 음침했던 약대건물, 자작나무 작은 숲이 있던 캠퍼스 만큼은 진짜로 참 좋아했는데 말이다. 담에 서울 가면 꼭 들러봐야지 하길 벌써 십 수년. 공수표가 될 게 뻔한 다짐 따위 이젠 또 하기도 머쓱할 지경이 된 지금 약대에서 불륜하는 드라마를 보고서야 다시금 학교를 떠올린다. 지금쯤 단풍이 참 고울 교정.. 뭐니 최진언 강설리...약대의 추억을 더럽히지 말라능. -,.-

민전무가 천년제약의 주력제품 '푸독신' 의 임상시험 결과를 조작했다는 대목이 막 나오고 있다. 그래, 뭐 드라마니까. 실험 나름이겠지만 어쨌거나 실험결과를 조작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약의 개발단계- 단순 trial 에서부터 in-vitro 시험, 임상시험까지- 고리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그 모든 개연성을 아귀 다 들어맞게 조작한다는 건 실험을 다시 하는 편이 차라리 더 쉬울 정도로 많은 노력과 시간과 치밀함을 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유럽 같으면 매의 눈을 가진 전공자 출신의 검시관들이 모든 그래프 하나, 수치 하나도 놓치지 않으므로 조작된 결과를 가지고 그 모든 관문을 통과했다면 나쁜 짓일지언정 일단 대단하고 억세게 운 좋은 것만은 틀림 없다.

약품허가 일을 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간다. 주로 독일/스위스/영국 health authorities들을 상대로 일하는데, 업무의 특성상 그들은 언제나 '불충분함, 증명하시오, 해명하시오, 설명하시오, justify 하시오' 투성이의 단골멘트를 던지고 방어해야 하는 우리쪽은 이에 맞서는 논쟁과 증명과 설득을 쥐어짜낸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에는...이 약품의 안정성 시험결과가 왜 아직 12개월 뿐인지를 쌈닭처럼 설명하는 것보다는 커피향 속에서 사라락 낙엽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따지고, 증명하고, 논쟁하는 일이 유난히 하기 싫고 피곤한 날...그런 날에는 전혀 다른 직업을 갖는 꿈을 꾼다.

다시 태어나면 luxurious 뷰티살롱의 주인을 직업으로 삼아야지 (이 말을 할때마다 남편은 웃다 넘어간다). 목욕, 피부관리, 마사지, 네일케어, 음악, 건강차...가족과 베프들에겐 무한번 이용 가능한 쿠폰을 선물하고 계절마다 새로운 인테리어에 향기로운 내부...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곳으로 만들어야지. Health authorities를 상대하느라 지친 약품허가부서 출신의 약사 고객이 있다면 기꺼이 VIP 서비스를 해줘야지 (사메 2차 넘어감). 만일 나에게 딸이 있다면, 책 읽고 공부하는게 화장하고 피부관리하는 것보다 우월하고 고상하다고 가르치지 말아야지. 봄이면 꽃도 좀 보고 가을엔 단풍을 즐기고...숙제 한번쯤 안 해가도 하늘이 무너지진 않는다고 사실대로 말해줘야지. 그래야지...그래야지...

꿈을 실컷 꿨으면 다시 일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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