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마다 각설이처럼 돌아오는 이 허함을 뭐라고 표현하면 될까. 마치 내 인생이 나를 두고 흘러가는 기분? 분명 내 인생인데, 당사자인 내가 뒤처져 딴 짓에 정신 팔려있는 사이 내 삶은 저만치 혼자 달려나가고 있는 느낌. 그런 당황스러움과 조급증 같은 것이 가을만 되면 도지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즉흥 홀로여행의 좋은 구실이 된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기엔 일이 좀 많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무실을 나섰다. 이번 주말엔 갈 수 없는 남편이 자기도 같이 가게 일주일만 미루면 안되냐 했는데 다음주엔 방이 없으니 이것 또한 이 홀로여행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목적지는 베아텐베르크(Beatenberg). 인터라켄 서역에서 버스로 30분 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유명 관광지인 인터라켄 동역과는 반대편이라 한산하고 조용하다. 풀 뜯는 소나 양들이 전부인 것 같은 마을.
큰 호텔은 없고 허름한 가정집같은 호텔이 대부분인데 이 숙소 또한 그 중 하나.
도착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볕 잘 드는 발코니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거였다.
그러고는 슬슬 산책을 나섰다. 역시 산간마을의 저녁은 일찍 찾아오는지 벌써 노을빛이 도는 것 같다.
구름 위의 마을이다. 가파른 산길을 버스로 한참 올라오긴 했지만 저 구름층을 보니 고지대라는게 새삼 실감이 나네.
다음날 아침. 등산을 할 예정이라 이른 아침부터 날씨가 궁금했다. 수묵화같이 멋지구리하긴 한데 등산을 가도 되는 것이냐..;;
스위스 생활 십 수 년만에 터득한 경험이 하나 있으니- 내가 올라간 순간의 산꼭대기 날씨가 어떨 지는 산신령님만이 아신다는거다.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믿어보련다. 그, 그런데...안개가 쫌 너무하지 않냐. ㅠㅠ 내 믿음을 시험에 들게 하지뫄 흐엉... ㅠㅠ
곤돌라를 타는 그 순간까지도 믿음에 확신이 없었다.
두꺼운 구름층을 통과하자 거짓말처럼 나타난 파란하늘. 오오 산신령님의 영험함이여...
니더호른 정상 1950m. 우리나라 한라산 높이랑 거의 같다.
보이는 것은 구름의 바다. 내리쬐는 태양, 파란하늘, 안개 속 알프스.
구름이 마치 하얀 용암 내지는 콸콸 흐르는 강처럼 보였더랬다.
푹신해보여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지만... '스위스 니더호른에서 구름에 뛰어든 한국인 1명 사망' 뉴스 따위에 나올 순 없지.
폭포 같기도 하고
어쩐지 속세의 풍경이 아닌 것 같은.
원래는 저 아래로 툰 호수가 보여야 하지만 구름층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나름 신선뷰 같아서 나쁘진 않았지만서도.
유유자적중인 산양 서너 마리를 사람들이 숨 죽여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이 부근이 야생산양들의 집락지라는 얘긴 들었지만 볼 수 있을거라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주로 아침 일찍 활동한다고 해서.
체구도 작고 뿔도 짧은걸로 보아 아직 어린 녀석인가 보다. 포즈를 좀 취해주더니 썩소(ㅋ)를 남기고는 암벽 아래로 홀연히 사라져갔다.
산양들이 즐겨 다니는 곳은 이렇게 깎아지른 암벽이라, 이래저래 사람들이 쉽게 관찰할 수는 없다. 운이 좋았나보다.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계곡.
마을로 돌아와보니 '미스 베아텐베르크' 선발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 멋진 소를 뽑는 행사라는데. ㅎㅎ
소들이 한 50줄도 넘게 줄지어 있었다. 온 마을 소란 소는 다 모인 모양.
송아지들도 꽃단장
인간세계의 공기가 이렇게 맑을 수도 있구나 싶은 이 산골마을의 2박 3일이 어느덧 저물어간다.
가을아, 조금만 천천히 가려무나.. 내 인생아, 나를 두고 가지 마라. 혼자서 막 뛰어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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