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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옹졸하게 찌질하게

by SingerJ 2022. 1. 25.

새로 들어온 회사 동료 R. 매일 정성이 뚝뚝 떨어지는 도시락을 갖고 오는데, 아내가 싸주는 거라고 한다. 아내 직장이 취리히에 있다면서.. 그럼 왕복 3시간 출퇴근에, 풀타임 근무에, 저녁밥도 해준대고, 도시락도 매일 싸준다는 얘기다.


우와 진짜 대단하다! 라는 내 감탄에 R 말하길..."10분이면 되는데 뭘~"


아니 이 사람아 어딜 봐서 그게 10분?! 10분짜리 음식이 절대 아니구만. 미리 다 해놓고 담기만 하는 시간을 말하나. -_-a 그런데 표정으로 봐서는 진짜 후딱 되는 쉬운 일이라고 믿는 눈치다. 편견 갖긴 싫지만 인도남자. 집안일 거의 안해본 듯한. 마누라 고마운 줄 잘 알면서도 팔불출 같을까봐 밖에선 괜히 센 척 하는 남자들 있지 않나? R도 그런거겠지 처음엔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센 척이 아니다.

도시락이라면 나도 싼다. 하지만 나는 직장이 멀지도 않고, 금요일엔 도시락 대신 샌드위치를 사 가며, 평일 아침 저녁은 안 차려 먹는다. 도시락이 나와 사메에겐 유일한 끼니다운 끼니다 보니 내 딴에는 신경 써서 싸는데도 R의 도시락 옆에 있으면 순식간에 오징어가 되는 것. ㅋㅋ 내용물이야 어떻든 직장인이 도시락을 싼다는 자체가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다들 알기에, 사메네 회사 동료들은 내가 전업주부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R의 도시락은 전업주부 두엇은 있어야 가능한 수준인데... '10분이면 된다' 라는 그의 말이 왜 그리 홀딱 깨던지. 집에서야 아내를 업고 다니는지 모시고 사는지 그거야 내가 모르는 거지만 왜 괜히 내 남편도 아닌데 괘씸해서 부아가 팍 났더랬다.

애꿎은 우리집 남자에게로 불똥은 튀고...오늘 저녁의 대화:

나: 오늘 도시락 맛있었어 안 맛있었어
남편: 맛있었지. 맛 없는 날은 없지. (가정평화를 위해 영혼 없이 내뱉는 모범답변 ^^;;)
나: 근데 왜 칭찬 안했어 맛있었다고
남편: 네가 한 음식 평가하지 말라며~ 닥치고 감사하며 먹는거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며~
(아니 그거야 닥치고 찬양하라는 말이었지.. -,.- 결혼 초반에 한 번 뭐가 짜다고 하길래 교육차원으로다가 -_- 쏴붙인 말인데 그걸 이럴 때 써먹나.)

꼬치꼬치 따지는 여자와 결혼해서 사메는 좀 피곤하겠다던 우리엄마 말이 생각난다. (엄마 누구편? -ㅅ-) 82년생 김지영들보다 먼저 태어나 여성의 노동이 얼마나 곧잘 평가절하 되는지를 느끼며 자란 74년생 전모씨는 10분이면 된다던 그 말 한마디 가지고 도시락 싸는 내내 두고두고 곱씹으며 거슬려하는 중이다. 옹졸 치졸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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