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새벽에 이불 때문에 한바탕 다툰 후, 잠이 다 깨버려 더이상 잘 수가 없었다. 호통 치고, 애원하고, 이불을 따로 덮어도 봤지만...언제나 내 이불은 ㅅㅂㄴ 몸뚱이에 둘둘 말려 있는 것이다. 아 진짜...끓는다... 저 망할 놈의 -ㅅ- 잠버릇은 왜 결혼전 5년씩이나 숨어있다가 잠복기 풀린 바이러스마냥 이제서야 각성한건지 미스테리다.
궁둥이를 발로 있는 힘껏 밀쳐주고는, 일찍 일어난 김에 등산이나 가기로 했다. 초코바, 사과, 귤, 바나나 한 개씩 챙기고 물도 한 병. 아, 중요한 걸 잊을 뻔. 오늘 해먹으려던 고기 냉동실에 도로 넣어놔야지. 사메 일어나기 전에 얼른 꽝꽝 얼어라, 밥 못 해먹게. -_- 당신은 오늘 밥 말고 먹어야 할 게 있잖수? 엿 잡솨. 실컷 잡솨! 흥.
역으로 가는 트램 안에서 급 정한 행선지는 그린델발트 피르스트.
당일치기 가능한 산 중에서 오늘 날씨가 제일 양호할 것으로 예상되는 산.
가을볕이 좋은 날이다.
앞으로 3-4주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달을테고, 그 후엔 금년의 등산시즌도 끝이 날 터이다.
이 산은 다른 산에 비해 경치가 안 좋긴 한데 (누리끼리한 풀로 덮인 돌산), 단체관광객이 적어 한결 호젓한 등산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상에 있는 바흐알프 호수는...오묘한 청록빛으로 반짝이는 이 호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너무 차가워서 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괜찮아. 고기 잡으러 여기 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바람에 파르르 이는 잔물결과 햇빛에 부서지는 물...이걸로 족하다오.
신께서 나를 이 먼 스위스땅에 살게 하신데엔 다 그럴만한 깊은 뜻이 있었을 지도. 열 받았을때 알프스에서 식히라거나 하는;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아니다 얘는 개구리가 아니고 두꺼빈가..
대자연을 보면, 에고 그래 인생 뭐 있나 싶은게...행복하게 건강하게 한평생 살다 가자, 싶고...진부하지만 또 그렇게 화가 풀린다는 스토리인 것이다.
'나 지금 맞게 가고 있나' 라는 의심이 들 때쯤 꼭 나타나는 표지판. 인생길에도 가끔 나타나 안심시켜주면 좋으련만. 제대로, 잘, 가고 있다고..
돌아오는 길에 인터라켄에서 내려 하더쿨름 (Harder Kulm) 전망대에도 들렀다.
남편한테 복수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이번 주말에 애들 데리고 친정 가서 자고 오겠다' 라고 한 후 안 가는 거라던데 ㅋㅋ 우리집은 내가 사라져줘서 오늘 더 편하고 좋은거 아닌감? -_- 다음부턴 뭔가 더 강려크한 복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저녁 푸짐하게 사먹은 후 밤 늦게 들어와 쓰러져 자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불이 두겹으로 덮어져 있다 (참 나 이게 사과냐.. -_-). 그러곤 불쌍한 얼굴로 그러는거다. 어젠 너무 외롭고 슬펐다고. 그게 아니라 배고팠겠지 흥. -_- 역시 이 사람한텐 집밥 못 먹게 하는게 최고의 복수인갑다. 밖에 나가 먹으면 배탈이 잘 나는 사람인지라 사 먹길 두려워하는데 집에는 그 좋아하는 고기가 다 꽝꽝 얼어있으니 슬프기도 슬펐겠제. -ㅅ-
그래서 오늘 메뉴는 원래 어제 먹으려던 양고기 타진. 흑맥주 넣는 레서피는 처음 해봤는데 색깔도 잘 나고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가려줘서 좋았다. 싸우고 산에 잠깐 가고 먹고 치우고.. 또 이렇게 주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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