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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부엌단상

by SingerJ 2022. 1. 25.

왠지 널찍해진 기분이 들어 방 안을 둘러보니 여름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선풍기가 사라졌다. 더위는 진즉에 물러갔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남편이 드디어 선풍기를 지하실로 돌려보냈나 보다. 더위가 다 뭔가. 이젠 아침 저녁으로 얼마나 쌀쌀한지 여름이 과연 오긴 왔었나 싶게 아득한 옛날일 같다.

살짝 찍어먹어 보니 이번 레몬청은 드물게 대성공인 것 같다. 스위스산 레몬 말고 수입산을 쓴 덕분인 듯 하고 ㅋ (향과 즙이 어쩜 천지차이), 이번엔 설탕을 제대로 팍팍 넣은 때문인 것도 같다. 레서피에서 넣으라는 설탕량은 인간적으로 너무 많아 보여서 매번 줄이곤 했는데 그만큼 넣으라는데엔 역시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살림의 여왕이라는 모 탤런트의 포스트에서 힌트를 얻어 시들어가는 방울토마토 한 팩을 처리하기로 한다. 마이 귀찮구먼... 샐러드 하나에 30분이 넘게 걸리다니. 이거 해놔봤자 5분이면 없어질 한입거린디. -ㅅ-

기름 곱게 발라 바삭하게 구워 놓은 김을 국에 푹 적셔먹는 걸 보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던 ㅎㅎ 엄마가 매우 이해된다. 껍질 벗긴 노고를 기리는 묵념이라도 하고 먹든가 아님 슬로우 모션으로 먹어야 될 것 같은 샐러드다. 다음부터 살림의 여왕 포스트는 보기만 하는걸로.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커피랑 먹고 싶어서 두툼한 카스텔라.

냉동실 속 묵은 닭고기 긁어모아 찜닭.

2인 가족에 걸맞지 않는 저 거대한 그릇은 사실 실수로 큰 지름을 주문한건데 쓰다 보니 대식가 커플 -ㅅ-; 에게 딱 적당한 사이즈인 것.

처음 담가본 피클이 먹을만하게 익었다. 가득찬 새 김치통 앞에서 흡족해하던 엄마의 기분이 지금 이 기분과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또한 참기름, 고춧가루 등을 시골에서 공수 받는 기분은, 고급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 세트를 선물받았을 때 내가 느끼는 그득함과 흡사하지 않았을 지.


배불리 먹은 남편은 이내 낮잠에 빠져들고, 끓는 커피물의 보글보글 소리와 빗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는 일요일 오후의 부엌이 평화롭다. 내 비록 밥 대신 먹는 알약 개발에 적극 찬성하는 사람이긴 해도, 평생 밥 안하는 대신 비 오는 날 밥냄새 나는 부엌의 작은 낭만을 영영 버릴 수 있겠느냐 물으신다면...아주 잠깐, 한 10초 정도는 살짝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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