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빠한테서 종아리 맞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건 바로 벌레 때문이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식사 중에 왕나방 한 마리가 들어와 펄럭거리기 시작한 거였다. 놈이 들어온 순간 이미 얼어붙은 나는, 내 쪽으로 가까이 오자 비명을 지르며 숟가락을 내팽개치곤 방으로 뛰쳐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방이 문도 열 수 있다고 생각한건가 ㅋㅋ). 국그릇이 그 바람에 나동그라지며 팍 쏟아졌다. 암말 없이 밥을 다 드신 아빠는(자식 훈육도 식후경) 나와 언니를 델꼬 뒷산으로 갔다 (왜 자기까지 혼나야 했냐고 언니는 두고두고 원망을 😂). 손엔 기다란 구두주걱을 들고서.
일단 종아리를 맞았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철썩) 그까짓 벌레 한마리에 벌벌 떨면, 어? (두 대째 철썩)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래, 어?" (철썩 철썩) 종아리 타작이 끝난 후, 저어-기 보이는 나무까지 갔다 오라고 했다. 불빛이라곤 없는 깜깜한 길... 걸으랴, 눈물 콧물 훔치랴 바쁜 와중에도 개탄스러웠다. 아니 아빠는 증말 문제의 본질을 모르시네.. ㅡ,.ㅡ 안 무섭다고요 이거는.. 깜깜한데 혼자 갔다 오는 것 따위 진짜 하나도 안 무섭다고. 내가 무서운건 벌레라고요!
어릴 적 나의 벌레공포증은 심하다면 좀 심했을 수도 있다. 방아깨비 한마리가 계단 난간에 앉아있는 바람에 학교 못 갈 뻔한 적도 있고, 곤충채집 같은건 꿈도 못 꿨다. 여치의 녹색은 왤케 소름끼치게도 선명한 것인가. 방아깨비는 왜 무섭게스리 까딱거리는가. 상상만 해도 이상한 잠자리 날개의 촉감은 또 어떻고. 헤르만 헤세의 '나비' 를 읽을 때도 제일 충격이었던 건 어떻게 나비를 부숴뜨릴 정도로 맨손으로 막 만질 수가 있지 (악!) 하는거였다. 곤충들아 너희들에게 결코 악감정은 없다. 다만 무서운 걸 어떡하냐...;; 이 정도 공포는 흔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으나 아빠 입장에선 심각해 보였을 수도 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벌레들과 대합창을 하며 자라셨을테니 '딸아 대체 넌 어디가 모자라 이러는 것이냐!' 싶었을 지도.
오늘 온라인 회의 중에 방구벌레 한마리를 발견했다. 내 책상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별로 말할 게 없는 회의였으므로 안심하고 마이크를 끄고는 기다란 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방구녀석을 골프 치듯, 그러나 너무 세지 않게 톡- 톡- 몇 번의 샷에 걸쳐 멀리멀리 밀어낼 수 있었다. 옛날의 나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이 놈은 위협을 느끼면 냄새를 풍기긴 하지만 내가 무서워하는 행동은 별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갑자기 펄쩍 뛰어 달라붙거나 날아오르는. 그리고 좀 굼뜨다. 이걸 알고 있으니 전보다 한결 덜 무섭다.
벌레라면 다 무조건 기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근데 이젠 나름 이성을 유지하며 대처할 수 있게 됐나부다. 방구녀석은 내 블랙리스트 최상위 까지는 아닌 것이다. 이런 하찮아빠진 것도 경험의 힘이라면 힘이고, 성장이라면 성장인건가. 벌레가 옷에 달라붙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이 살아생전 과연 가능할 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오늘의 나는 한결 의연하고 어른스러웠다. 나이 쉰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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