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의 변화:
11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동네 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싹 바뀌었다. 젖은 낙엽처럼 들러붙어 있던 가을을 이제 그만 털어내려는 듯 온 도시가 겨울을,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제법 겨울같은 날씨도 시작되었다. 오늘 출근길에는 러시아 털모자 쓴 사람을 세 명이나 봤다. 크리스마스 장식이라곤 집에 딱 하나 있는 비루한거나마 선반에 꺼내 놓았다.
# 빨랫감의 변화:
빨래를 남편에게 넘긴 지 한 달째. 빨랫감이 전에 비해 반으로 확 줄었다. 수건 한 장도 이젠 자기 일이라 그런지 한 번 쓸거 두 번 세 번 쓰고 내놓는 모양이다. 아니 이건 너무나 속 보이는 것. ㅋㅋ 당신 빨래가 80%라고 내가 글케 말할땐 안 믿더니만... 역시 직접 해야 깨달음을 얻는가 보다. 일주일에 세 번 운동 가는 데서 나오는 땀에 젖은 티셔츠, 추리닝, 수건, 스포츠 양말, 복싱할때 손에 감는 붕대 등등...다 자기 빨래라니깐.
집안일 분담은 어떻게 할건지 약혼자와 상의해봤냐고 물어보던 비자 인터뷰 직원이 기억난다. 그런건 그냥 알아서 같이 하면 되지 하나하나 콕 찝어 나눠야 하나요? 라고 (비)웃었던 게 설마 나일리가? -_-a 오늘날 우리집 가사분담표에는 '청소', '장보기' 같은 두리뭉실한 표현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대신 고기는 누가 사오고 온라인 수퍼마켓 주문은 누가 하며 베개커버는 누가 갈고 거울은 누가 닦는지 매우 쪼잔 세세하게 분담되어 있다. 세미나 가니까 집안일 좀 알아서 해 놓으라고 하면 꼭 "뭐뭐 할까?" 물어봐서 째려보게 되는 게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이 상세한 분담 이후 자기 뭐 하면 되느냐고 묻는 일이 없어졌다. 아...이런 쪼잔한 리스트 따위 도대체 어느 집에서 필요할까 했더니만 바로 우리집이었숴... 남자란 슬프게도 이런 미개한 방식이 잘 먹히는 종족이라는 걸 그 비자담당 직원은 알았던거지... 비웃어서 지송해유.
# 마음의 변화:
시험관 실패 후 남편은 아직도 내 눈치를 살핀다. 화나고 기분 나쁘고 돈 아까운 건 맞지만 벌써 옛날 일처럼 잊혀져가는 중인데 좀 뚱해 보이거나 말수만 적어도 아직 그 때문에 내가 우울해 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헤어지고 새장가 가라고 그게 훨씬 빠르겠다고 막말까지 했던터라 그 점은 미안하다만.. 진심이 아주 아닌 건 아니었다. 뭔가 선물을 주면 기분이 좋아질거라 생각했는지 바디용품 세트를 베개 밑에 숨겨놨다. 사줘놓고는 훔쳐 쓰는 일이 잦아서 그렇지 -_-; 마음씀은 고맙다.
내 기분이 나빴던 제일 큰 이유는, 나 본인이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닌데, 난임부부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단지 나이 때문에 시간에 쫒겨 이런 부담감을 느껴야 하지?? 라는 짜증 때문이었다. 시험관 해보길 그래도 잘 했다 생각하는 한가지가 있다면, 나이에 대한 끈질긴 우려를 적어도 이번에 한해서 만큼은 불식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건강에 이상은 없지만 나이가 많으니 아무래도 난자질이 떨어질거야, 세포분열은 오로지 난자에서 나오는 힘으로만 해야 하는데 나이가 많으면 힘들거야- 라는 그놈의 나이, 나이, 우려를 깨고 나의 알들은 -_-; 일단 확인 가능한 선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품질과 세포분열력을 눈 앞에서 증명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무슨 파충류도 아니고 왜 알을 다발로 키워서는 그 중 하나 건지겠다고 이 난리부르스인지, 내가 이러려고 시험관 했나 자괴감 들던 가운데 -_- 서글프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되면 기술력 덕이고 실패하면 다 여자 나이탓으로 귀결되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이가 간절한 것도 아닌데 단지 결혼을 했으니까, 결혼했으면 아이 하나는 있어야 왠지 더 가정다운 가정처럼 느껴지니까, 그런데 애를 남자가 낳을 순 없으니까, 이건 결국 내 몫으로 배당된 숙제 같은 거고.. 그 숙제가 만들어내는 부담이 싫어서 기분이 나빴다.
물론 사메는 나의 솔직한 마음을 다 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긴 얘기 (설교) 를 한다. 첫째- 아이가 생기면 생긴대로 기쁘고, 안 생기면 안 생기는대로 우리끼리 실컷 놀러다니며 살라는 신의 뜻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신의 뜻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따라서 나 때문에 2세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옳지 않다. 둘째- 네가 아이를 그닥 원하지 않는다는 건 결혼전부터 알고 있었고, 2세를 안 낳건 안 생기건 나한테는 어차피 상관이 없었다. 당신이 새삼스럽게 2세에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세번째- 한국에서의 시험관 시술은 절대반대다. 둘 중 누구도 간절하지 않은 2세를 낳기 위해 부부가 떨어져 살면서 한 사람은 멀리서 주사를 맞고 다른 한 사람은 혼자 남아 기다린다는 게 말이 안된다. 그런 주객전도가 또 없다.
잘났어 증말.. -ㅅ-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결국 자기만 완전 쿨하시고 나만 세속 오욕 집착의 결정체인 것. 알라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임을 어찌하여 믿지 못하는지 이 어리석은 양을 사메는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고 있다. 내려놓을 것을 남편이 저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니 나도 못 이기는 척 내려놔야 할까보다. 그게 말처럼 재깍 될 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산 홍합을 반값에 팔길래 잔뜩 사서 한솥 끓였는데 금방 다 먹어버렸다. 뜨끈한 국물 생각나는 계절이 어느새 또 이렇게 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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