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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햇 포도주가 나온 날

by SingerJ 2022. 1. 24.

금년의 햇 포도주 '보졸레 누보 (Beaujolais Nouveau)' 가 출시된 날이었다. 프랑스 보졸레 지방에서 그 해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11월 셋째주 목요일이 되면 전세계에 일제히 내놓는다는. 와인은 묵어야 제맛이라지만 과일향이 아직 생생히 살아있는 이 햇 와인도 인기가 꽤 높은 것 같다. 프랑스 사람인 프랑크가 점심시간에 얘기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금년에도 깜박 지나쳤을 거다. 잘 익은 김치보다 겉절이를 좋아하는 나로선 혹시 와인도 덜 익은게 더 취향에 맞지 않을까 이 포도주 맛이 늘 궁금했다.

진열장은 널찍한데 벌써 몇 병 남지 않은 것이.. 오늘 하루 불티나게 팔린 눈치였다. 손은 벌써 병 쪽으로 뻗어가고 있지만 예의상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본다. "한 병 살까?" 종교적 이유로 술을 안 마시는 사메가 포르투갈에서 포트와인을 마셔본 후로는 한 잔 정도는 괜찮다는 애매한 신앙행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ㅋ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사탄의 유혹처럼 -_-a 이렇게 큰 병을 사갖고 가도 될 지 좀 주저되는 것. 함 사와보란다. 딱 한 잔만 마시면 된다고.. 취하지만 않으면 자긴 순결하다고. 푸핫.. >_<

확실히 새 술의 느낌이 난다. 숙성되지 않은 날것의 포도맛이 남아있다. 술맛을 전혀 모르는 내 혀끝에서도 이 차이는 제법 분명하게 느껴진다. 포도주 한 잔씩을 천천히 다 비우는 동안 오랜만에 많은 옛날 얘기를 했다. 연구실 동료시절 싸워대던 이야기, 내 직장 때문에 베른으로 이사하던 날의 이야기, 결혼서류를 스위스로 보내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대사관 직원 때문에 사방팔방 서류 찾아 삼만리이던 시간,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시간을 다 참고 견뎠을까 싶은 우리의 속 터지던 시절의 이야기.

포도주 한 잔 마셨다고 벌써 더워지는 얼굴을 식히러 강변을 좀 걸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갓 post doc 일을 시작한 나에게 이집트에서 왔다는 웬 뽀글머리가 나타나 스핑크스가 달려있는 기념품 볼펜을 주던 날의 회상으로 넘어가자 나도 남편도 그때 일이 어제처럼 생각나 정신 없이 웃었다. 무슨 스핑크스가 헬로키티 얼굴을 해 가지고는 잘 나오지도 않는 볼펜이었다고. 지난 얘기를 하며 웃을 수 있다는 건, 그 시간이 우리 생에서 아주 값어치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고.. 소박한 안도를 느끼며 저녁 무렵의 강가를 술기운 덕에 춥지 않게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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