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 이야기

도마 깎는 노인(?)

by 달밤의 J 2026. 10. 9.

새 도마들이 도착했다.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기어이 일어나려 할 때, 아니, 어쩌면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조마조마한 시간 속에서, 이런 소소한 위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올리브나무 제품을 만들어 파는 M씨를 알게 된 건 Etsy에서 쟁반 하나를 주문하면서부터였다. 물건이 맘에 쏙 들어 후한 평점을 남겼더니, 판매 목록에 없는 것도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으니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했다. 그래서 원하는 크기와 높이의 도마를 주문했고, 그 이후부터 단골이 되었다.

흔한 게 도마인데도 내 바람에 꼭 들어맞는 물건을 찾는 건 의외로 풍요 속의 빈곤일 때가 있다. 조건에 얼추 맞는 걸 찾아내도, 원목이 올리브나무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 그런 면에서 M씨를 알게 된 건 행운이다.

주문을 넣으면 먼저 원목을 골라 사진을 보여주고, 이런저런 요구를 최대한 반영해 준다.

원목 부위 중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제외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통판 원목을 선호하는지, 아니면 여러 조각을 이어 붙인 형태가 좋은지, 테두리는 반듯하게 다듬을지 자연 그대로의 모양을 살릴지, 홈(juice groove)를 낼 것인지, 밑면에 미끄럼 방지용 발을 달 것인지, 손잡이가 필요한지, 그렇다면 어떤 색과 모양을 선호하는지. 지금이야 나도 제법 디테일하게 주문하지만, 처음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점들을 M씨가 먼저 짚어주고 조언해 주었다.

 

진행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기에 도마의 탄생 여정을 함께하는 재미가 있다. 태초에 원목이 있었고, 그중 한 토막이 골라져 다듬어지고, 마침내 하나의 완성품이 되는 과정.

도마 정도는 눈 감고도 만들 법한 경력자인데도,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꼼꼼히 몇 번씩 챙기는 모습이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그 수필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을 정도로.

 

아름답다. M씨가 예고했던 대로.

“도마들이 정말 아주 예쁘게 나올 것 같아요.”

둘 중 하나는 아래에 쟁반이 딸린 형태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런 형태의 시판 제품은 많지만 올리브나무로 만든 것은 찾을 수가 없어 따로 주문한 건데 마음에 쏙 들게 완성되었다.

그래, 내가 그의 단골이 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작용했던 것 같다. 자기가 만든 물건을 스스로 참 예뻐하는 것 같아서. 모르긴 몰라도, 제품을 부치기 전 “잘 가, 자슥들! 이쁨 받으며 잘 살아야 해!” 하고 작별인사도 건넸을 것 같다.

'오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둘기네  (0) 2026.10.02
펜트하우스 산후조리원 개장  (0) 2026.09.30
가족 하이킹  (0) 2026.09.28
기다린다  (0) 2026.09.23
그 사람은 알까  (0) 2026.09.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