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상관 없이 무작위로 후일담을 적어보기로 한다.
이 날은 'Lava tour' 라고- lava (화산에서 흘러나온 마그마가 굳어져 생긴 지형) 지역을 말 타고 둘러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용암 굳은건 아이슬란드 여기저기에 흔하므로 이걸 보는게 주목적은 아니고 사실 핵심은 말 타기로, 이 곳에 오면 꼭 한번 해봐야 할 것으로 꼽힌다. 다른 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참고로 요 아래 사진이 lava. 이 경우는 그냥 바위처럼 평범하게 생겼는데 용암이 어떻게 흘러 굳어졌는가에 따라 훨씬 특이한 모양으로 생기기도 한다.
아이슬란드 말은 보통말보다 키가 작고 통통하며 꼬리가 더 길다. 체구는 작아도 강하며, 성격이 매우 유순하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말이 3가지 방식으로 걷는데 비해 아이슬란드 말은 다섯 가지 걸음방식이 있어서 일부 승마종목에서는 아이슬란드 말을 전용으로 쓴다고 한다. 바이킹 시대 (9세기)부터 지금까지 고유 혈통을 순수하게 쭉 유지해오고 있다니 대단하다.
말 타기 전날밤 꿈까지 꿔가며 두려움에 떨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메에게 통보를 했다.
"난 도저히 안되겠어...그냥 혼자 타. 말 사진이나 찍으면서 기다리지 뭐."
마치 전장에서 총이라도 맞고 전우에게 혼자 탈출하라는 멘트 같지만, 나름 비장한 이유가 있었다. 절대로 말에서 떨어지면 안되는 이유가. 낙마해서 유산하는 드라마 여주인공이 많던데 그 경우는 아니었고 ㅋ 독감 걸렸을때 기침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 이후 얻은 갈비뼈 부근 통증이 아직도 심해서였다. 당분간 뛸 수도 없고 무거운 걸 들 수도 없다. 하물며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아마 그 자리에서 꼴까닥 -_-; 할 지도.
사메 왈, "에이, 떨어지긴 왜 떨어져~... 남들도 다 하는데."
그래 바로 그거거든. 남들 다 하는걸 못하는 사람이 꼭 있어요! 그리고 그게 하필 나야! ㅠ,.ㅠ 진짜 웬만하면 18초 대에는 다 뛴다는 100 미터를, 컨디션 좋으면 19.8, 보통 때 20.5...이렇게 뛰어봤나요.. 그나마 다행인건, 아이슬란드 말은 거의 조랑말인데다 걸음걸이가 안정적이기로 유명하다는 사실이었다.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말을 타기로 했다. 이 망할 놈의 호기심.. 천성이 본시 게으르고 변화에 취약한 나를 그나마 발전적으로 이끌어 준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이 호기심 때문에 언젠가는 일을 한번 내고야 말지 싶기도 한. 제발 오늘이 그날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말들은 쉬는 중인 것 같고...오늘 탈 말들은 안에서 안장을 얹고 대기중.
대기중인 말들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큰 카메라는 더이상 갖고 들어갈 수 없다. 아쉬운대로 소형 똑딱이 카메라만 챙겨 들었다.
타는 사람의 체격에 맞춰 알맞은 말을 배정해준다.
내 말! 이름을 두 번이나 듣고도 잊어버렸다. 나 또한 이름 희한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다만 너 이름 인간적으로 너무 어려운거 아니니.. 크림색 갈기를 가졌으니 임시로 크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조교가 고삐를 내게 건네주자 스스럼 없이 저벅저벅 따라 걸어왔다. 작은 사진기로 한장 찍는 것도 혹여 심기를 거스를까 엄청나게 조심스러웠다.
타 본 말이라고는 우리아빠 등말과 회전목마가 전부인 내가 과연 1.5시간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비상시엔 갈기를 꽉 움켜쥐면 멈추라는 신호로 말이 이해한다는 조교의 한마디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건 일종의 복선이었던게지.. 써먹을 일이 생길거라는 예감이 스스로도 들었던거야. ㅠㅠㅋ
겁 먹은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조교가 다가와 "She is really really good and gentle, don't worry." 라며 안심시켰다. 잘 부탁해 크림양. 그저 파리를 쫓으려 휘두르는 크림양의 꼬리바람 한번에도, 의미 없는 힝힝 콧김 한번에도 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조마조마했다. 내가 웃어도 웃는게 아니야...
저렇게 용감한 꼬마도 있는데.
왜 누나만 말 타고 자기는 안 되냐고 주저앉아 대성통곡 중인 남동생.
준비하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말들. 누워 자고 있는 녀석도 있다. ㅎㅎ
말이 걷기 시작하니 오히려 훨씬 균형잡기가 쉬워졌다. 앞말이 걸으면 자기도 걷고, 멈추면 멈추고, 줄 설때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서고. 와...똑똑한데! 말몰이 담당 시베리안 허스키는 할 일 없이 신나게 혼자 놀고 있고 ㅋ 말들은 개 목동 없이도 알아서 잘 하고 있었다.
다만...틈만 나면 길가에 난 풀을 뜯어 잡숫는 통에 그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서 공포의 도가니탕이었다. 다른 말들도 거의 그러는 것 같았는데 사메의 말과 크림양은 유독 군것질을 좋아하는지 한번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말걸음 리듬에 몸을 맡긴채 느끼는 햇빛, 바람, 들꽃은 '이 얼음나라에도, 우리도 이런 여름 있다' 라는 걸 온몸으로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처음 타는 것 같지 않게 자세가 좋다는 칭찬까지 들으며 (가슴을 곧게 펴야만 근육통이 덜하기에 의도치 않게 바른 자세 ㅋㅋ) 마지막 10분을 남겼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 위기가 찾아왔다. 앞사람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크림이에게 한번 살짝 킥을 주라고 조교가 말했다. 진짜 살짝만 건드렸을 뿐인데 얘가 갑자기 더그덕 더그덕 발굽소리까지 제대로 내면서 달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ㅠㅠ 순간 엄청나게 당황하고 무서웠는데, 비상시에는 갈기를 움켜잡아 보라는 말이 생각이 났다. 쥔다고 쥐긴 했는데 겁에 질려 손에 힘이나 있었을 지. 놀랍게도 말이 슬로우 모션처럼 속도를 늦추었다. 이미 균형을 잃고 간신히 매달리다시피 버티고 있던 나는 아마 말이 한걸음만 더 그 상태로 걷거나 갑자기 멈추었다면 곧장 떨어져 굴렀을 게 틀림 없다.
떨어지기 일보직전에 나보다 더 당황한 듯한 조교의 얼굴이 잠시 시야에 들어왔고, 아 기어이 사고를 저지르는구나 라는 생각도 그 와중에 들고, 어떤 자세로 떨어져야 갈비뼈 부분에 가장 무리가 적을까 등 그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결국엔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이 말 저 말과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언젠가 또 승마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절대 안하는 걸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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