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1년. 빵이나 케잌 같은건 집에서 해 먹는거 아니라는 내 소신(?)이 지금보다 훨씬 굳건했던 시절. 티라미수만은 예외였다. 오븐도 없거니와 케잌 굽는 흥미 따윈 더더욱 없었던 기숙사 유학생에게도 티라미수 만큼은 참 쉬웠으므로. 반죽도 굽기도 필요 없다. 모양 신경 안 쓰고 무심하게 만들어 푹 떠 먹으면 되는 것까지...이 디저트는 귀차니스트에게 실로 완벽하다. ㅎ 그리하여 티라미수는 내 손으로 만들어 본 첫 디저트이자 지금도 꾸준히 해먹는 달다구리가 되었다.
첫 시도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크림치즈를 사러 갔다가 마스카포네 치즈를 집어왔는데, 그때만 해도 마스카포네가 뭔지 몰랐던 나는 먹어보고서야 잘못 샀음을 깨달았다. 그 때 그 치즈통에 적혀있던게 티라미수 레시피였다.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따라했지만 알고보니 이 레시피는 나름 엄선된거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결국 이것만한게 없다.
계란과 알콜이 들어가지 않는 버전이고, 마스카포네:생크림= 6:4 정도로 섞어 필링크림을 만든다. 설탕량은 크림의 10% 정도.
커피에 적신 레이디핑거 비스킷을 깔아주고
크림으로 덮고
또 적셔서 한층 올리고
크림으로 덮어주면 끝. 카카오 파우더는 미리 뿌려두면 축축해지므로 몇 시간 후 또는 먹기 직전에 뿌리는 걸 권장한다.
비스킷, 커피, 크림이 잘 어우러지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뒀다 먹는게 좋다. 주로 토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먹으려고 금요일 밤에 만들어놓곤 한다.
내가 먹어본 최고의 티라미수는 어느 겨울 로마의 카페에서였다. 12월 31일, 문 연 가게가 적었던 그 날은 몹시 추웠고, 도망치듯 들어간 작은 카페에는 거대한 그릇에 가득차 흡사 출렁이는 시루떡처럼 보이던 티라미수가 있었다. 나이 지긋한 카페 아저씨가 한 주걱 푸욱 떠 커피와 함께 내준 그것은.. 아...추위와 피곤을 단번에 녹이는 맛이었다. 아무리 해도 그 맛을 재현할 수는 없지만, 만들때마다 로마에서의 새해 첫날과 티라미수가 좋은 기억으로 떠오른다.
남편이 일어나기 전 좋아하는 커피잔에 커피를 따르고 한조각 티라미수를 곁들이는 나만의 조용한 아침.
이것은 토요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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