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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프로와 아마추어

by SingerJ 2022. 1. 26.

작년말 나를 잠시 고민에 빠뜨렸던 한 동료의 실직. 마침 충원이 필요한 내 팀으로 오게 하든지, 그게 아니면 그는 해고될 상황이었는데,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후자를 택했다. 죄책감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내 대답이 긍정이었다 한들 그 동료쪽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지는 모르는 일이므로. 다만, 염려를 했다. 전공분야가 워낙 달라 비슷한 자리로 가긴 힘들겠구나...다른 분야에 신입으로 들어가든지, 아님 억수로 운이 좋아야겠다고.

그런데 그건 나의 쓸 데 없는 염려였다. 그의 팀장이었던 닐스의 말에 따르면, 해고된 지 3주도 안되어 새 직장을 구했을 뿐 아니라 원래 자리보다 더욱 거리가 멀어(!)보이는 업무에 경력직으로 들어갔단다. 내 의아함을 눈치챈 듯 닐스가 덧붙였다.

"웃기지! 전혀 안 맞는 사람 뽑은 것 같지? 근데 스위스에서는 그저 스위스 사람인게 최고스펙이야." (닐스는 독일인)


똑같은 말을 몇년 전 사메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외국인을 뽑을 때는 자기네 조건에 99% 맞는 후보만 고집하면서 스위스인 후보가 나타나면 다른건 더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푸념을.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자국민 선호하는거야 당연하지 뭐! 라고 핀잔을 줬었는데...실제로 보게 되니 좀 놀랍다. 똑같은 이력서로 非 EU 출신 외국인이 지원했다면 서류통과 확률 20%도 넘지 못했을거라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사진동아리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프로는 고객 마음에 드는 사진을, 아마추어는 자기 맘대로 찍으면 되는거라고. 아...그렇다. 난 내가 제법 프로마인드를 가졌다 생각했는데 이럴때 보면 아직도 해맑(!)은 구석이 있는가보다. 업무에 대한 전문성, 경험, 회사가 줄줄이 나열한 조건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난 왜 당연히 그게 우선일거라 생각했을까. 한마디로 엿장수 마음인 것이다. 모든 후보에게 같은 걸 바라야 할 의무는 고용주에게 없다. 외국인에겐 상당한 수준을 까다롭게 요구할지라도, 자국인이면 동떨어진 일을 하다 온 풋내기라도 얼마든지 괜찮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학에 낙방했을때 슬펐던 이유는 단순히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나보다 잘 하는 아이들이 붙어서 내가 떨어진거면, 난 그럼 내 실력에 맞는 자리로 가면 되는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고 뒤죽박죽이더라는 거다. 한참 과분한 곳에 거저먹기나 다름 없이 합격한 이가 있는가 하면, 공부는 잘 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합격하고도 못 간 급우도 있었다. 시험 봐서 결정하기로 했으면 약속대로 시험점수로만 평가할 것이지, 현실은 치사하게 돈, 운, 타이밍 등 온갖 변수들이 플레이 하더란 거다. 계단식 논에 차례로 물이 채워지듯, 저마다에게 '합당한' 자리가 마땅히 주어지는건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더라는 거다. 이제 나도 프로라 그까이꺼쯤은 다 안다 생각했건만 아직도 반은 아마추어였던 모양. 스위스에서 스위스인 동료의 재취업 따위를 걱정했다니 난 정말 어지간히도 순진한 외국인 동료였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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