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창문을 좀 열어두고 잤다간 밤새 방 안을 점령해버린 싸늘함에 놀라 잠을 깨게 된다. 오늘 아침엔 방문 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뭔가 구수한 냄새에 눈을 떴다. 아 그렇지, 어젯밤에 슬로우쿠커를 켜놓고 잤지. 모닝커피 대신 아침을 여는 소고기 라구(ragout)의 냄새.
고기에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하고 (다 익으면 연해져서 포크만 갖다대도 잘라지므로 이보다 훨씬 큰 덩어리째로 써도 상관 없다)
채소는 늘 단골로 들어가는- 양파, 샐러리, 당근, 감자- 그리고 다진마늘 조금. 으깬 토마토 한 개.
콩나물, 깻잎 등 한국채소가 그리울 때가 많지만 유럽에 오고나서 새로이 가치를 알게 된 채소도 꽤 있다. 샐러리처럼. 마요네즈 광고에 등장하는 것 말고는 당최 무슨 맛으로 먹는건지 모르겠던 샐러리가 지금은 양파 마늘에 맞먹는 정도가 되었으니.
고기는 그냥 써도 되지만 이왕이면 시어링을 먼저 해주고
고기 구운 팬에 양파+샐러리+마늘을 볶다가 토마토 페이스트를 좀 넣고 더 볶는다.
눌어붙은 팬바닥은 흑맥주 (또는 레드와인)+ 육수를 부어 잘 긁어낸 (deglazing) 다음
알콜이 날아가고 소스량이 줄어들때까지 끓여준다.
고기, 채소, 다진 토마토를 슬로우쿠커에 다 넣고 소스를 부어 4-6시간 정도 익힌다. 몇 번 얘기한 적이 있듯이 나는 슬로우쿠커를 매우 아낀다. 낮은 열로 계속 끓이는 단순한 조리기구에 불과하지만 편리한 점이 꽤 많다. 일단 고기요리의 경우 백전백승 늘 연하게 익혀줄 뿐 아니라, 익는 속도가 현저히 다른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어도 상관 없으며, 오래 익혀도 채소의 형체가 잘 유지된다.
무엇보다도, 재료를 우루루 쏟아넣고 방치하기만 하면 음식이 짠 다 되어 나오는 그 점을 사랑한다. 자기 전에 켜두고 아침에 일어났을때, 또는 아침에 켜놓고 퇴근했을때 먹을것이 한 솥 만들어져 있다는건 우렁각시의 방문처럼 반갑다. 단, 슬로우쿠커의 단점이라면 음식냄새를 온 집안에 풍긴다는건데, 오늘처럼 써늘한 가을날에는 그것이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다 익은 라구는 어느 탄수화물과 먹어도 무난하다.
오늘은 쌀+렌틸+퀴노아 믹스와 먹었는데 으깬감자나 빵과도 잘 어울리고
익은 고기는 연해서 잘 찢어지므로 삶은 파스타에 소스로 얹어 먹을 수도 있다.
지난 여름의 뜨거움을 그새 까맣게 잊고 뭔가 뜨끈한 걸 끓여대고 있는 광경이라니. 인간이 과연 붕어기억력을 뭐라 할 처지가 되나 모르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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