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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715

풋풋함 우편함을 뒤적이고 있는데, 동양 여학생 하나가 쭈빗쭈빗 말을 걸어왔다. "Entschuldigung, kommen Sie aus Korea?" (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신가요?) 오랜만이었다. 초보 특유의 그 신선한 aura와 상기된 표정. (독일 와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 이 몸이라니 반가울 법도.) 곧이어 물 만난 듯 질문이 쏟아졌고, 아는대로 답해주었다. 전화신청은, 인터넷은, 외국인청은, 전입신고는... 후훗, 모든 질문이 똑같지 뭔가. 몇 년 전 나 또한 궁금해 하던 것들. "정말 고맙습니다 언니!"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는 공중전화로 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야? 여긴 벌써 어두워! 아직 방에 전화가 없어서 답답해..." 웃음이 났다. 촌스런 신입생들이 상큼한 이유를, 떡 돌리는 새댁이 이뻐.. 2021. 11. 1.
나도 그래 아파트 꼭대기에 줄 한 번 잘 맞춰 앉은 새들. 근 40분을 꼼짝 않고 저러고 있는 거다. 은행 갔다 오고, 차 마시고, 빨래 개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혹시나 하여 봤더니 아직도 여전한 그 포즈에 그만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훗, 미안. 사실은 바쁠 텐데. 날개 힘을 모으느라.. 바람을 읽느라. 그리곤 날겠지. 바쁘게 날아야겠지. 나도 그래.. 나도 그럴 거란다, 새들아. 2021. 11. 1.
밤이 무서버 모든 게 과장된다. 고민이 번뇌로, 바람이 절박한 소망으로, 커피냄새가 황홀한 마법의 향으로. '네버엔딩 스토리' 속 몬덴킨트의 숲처럼 밤만 되면 쑥쑥 자라나서는,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이 시간엔 아무렇다. 매우 아무렇다. 2021. 11. 1.
뒷모습 무겁게 맞이해서 미안했단다. 함께 해주어 고마웠단다. 돌아서는 뒷모습, 고이 새겨 맘 속에 넣을께. 가거라.. 잘 가거라, 이 해여. 2021. 11. 1.
있으면 좋은 욕실 전구 좀 갈아주십사, 연통을 한 건 지난 금요일. 아저씨가 오신 건 오늘 오후가 되어서였다. 제때 못 와 미안하다, 재촉하지 그랬느냐, 한다. "아 뭐 괜찮아요. 크게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렇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샤워, 세수, 양치- 좀 어둡다고 안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어둑한 욕실과는 점점 친숙해져, 오늘 오후 아저씨가 벨을 눌렀을 땐 서동요의 오색야명주 비밀 듣기를 방해한 그 방문이 나는 몹시 야속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돌아온 광명... 미안하다, 환영이 열렬하지 않아서. 나 알아버렸거든. 네가 '없으면 안 되는' 이 아니라 '있으면 좋은' 존재라는 걸. 나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였을 지 몰라. 2021. 11. 1.
호환불가 아침 먹으려 베이컨을 굽는데, 채 다 구워지기도 전에 후회가 밀려왔다. 아침엔 유독 기름냄새를 견디기 힘들다. 따뜻할 것. 부드러울 것. 그리고 담백할 것- 내가 바라는 아침식사의 조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사랑 (그 대상이 이성이든 동성이든)의 조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아침식사로 사랑을 먹을 수 없고 사랑 대신 아침식사를 먹을 수 없을 뿐. 2021. 11. 1.